소설 - 무라 (MOORA) 작가님 첫 번째 이야기 1-1

[RED 빨강 이야기] 1-1. 이발소 딸과의 첫 만남.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0.11.27 15:47 | 최종 수정 2021.05.20 17:34 의견 0

[빨강 이야기]

무라(MOORA)

일준의 2층 다락방에 난 창문 너머로는 시장의 입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일준은 오후 4시 즈음에 종종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곤 했다. 그러고 조금만 있으면 시장 입구 쪽에 위치한 건어물 가게의 마른 오징어 냄새나 고기만두 냄새 따위를 실컷 맡을 수 있었다.

할머니한테서 약간의 용돈을 받는 날이면, 일준은 친구들과 함께 시장에 갔다. 만두 가게 앞에 있는 낡은 게임기 앞에 나란히 앉아 격투 게임이나 전투기 조종 게임을 하고 남은 돈으로 꼭 고기만두를 하나씩 사 먹었다.

그러니 이발소 딸을 처음 본 것도 아마 만두 가게 근처였을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때였다. 일준은 그 첫만남의 기억이 흐릿했지만, 처음 서로 눈을 마주쳤을 때 소녀가 지었던 수줍은 미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원 가려면 어디로 가야해?”

만두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던 일준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힘이 있었다.

“공원?”

일준이 되물었다. 입 안에 가득 찬 고기만두 때문에 뭉개지는 발음이 창피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몰래 시장에 혼자 놀러 왔는데 길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소녀는 꽤 활기찬 편이었다. 초저녁의 서늘한 바람 때문인지 조금 떨 뿐이었다.

일준은 두류공원을 떠올렸다. 근방에서 공원이라고 할 만한 데라면 그곳 밖에 없었다.

두류공원은 뒷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산 아래 위치한 시장부터 두류공원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다만 밤이 되면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불빛 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빛이 없었다. 밤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할머니는 곧 사라질 동네엔 가는 거 아니라면서 일준한테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일준은 천천히 씹던 만두를 꿀꺽 삼켰다.

“어딘지 알아.”

“알려줘.”

“그럼 나 따라와.”

일준이 말했다. 남은 만두를 입 안에 밀어 넣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소녀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걸음마다 힘이 들어갔다. 단순히 소녀를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무서워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종종 뒤를 돌아보면 소녀는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일준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배시시 웃기도 했다. 그러면 일준은 흠칫 놀라 다시 앞을 보고 빠른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소녀가 부지런히 발걸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내심 좋아서 일준은 자주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시장을 벗어나 신호등을 건너고 도로변을 걷다가 포장되지 않은 샛길로 빠졌다.

“나 발 아파.”

조용히 잘 따라오던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준이 뒤를 돌아봤다.

“힘들다고?”

“아니, 진짜 아파.”

소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일준도 발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슬리퍼 사이로 모래가 자꾸만 들어와서 발바닥이 따가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소녀한테 다가갔다. 신발을 벗겨보니 발뒤꿈치가 까져 조금씩 피가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발이 작은 모양이었다.

“아프겠다.”

일준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준은 잠시 고민했다.

“나랑 신발 바꿀까?”

“그래도 돼?”

“응. 너는?”

“음, 나도 돼.”

소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일준이 씩 웃자 소녀도 배시시 웃어 보였다. 소녀는 발을 꼬물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일준은 슬리퍼를 소녀에게 신기고 소녀의 운동화에 자기 발을 구겨 넣었다. 조금 작아서 뒤꿈치를 꺾어 신었다. 이미 많은 낡은 신발이라 쉽게 구겨졌다.

“미안해. 발이 다 안 들어가.”

“괜찮아.”

소녀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산 중턱으로 향하는 오르막의 입구에는 ‘두류공원’이라 써져 있는 낡은 나무 표지판이 비스듬히 서있었다. 다행히 제대로 온 모양이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등산로 입구였다. 앞이 상당히 어두워서 일준은 소녀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소녀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저가 더 무서운 바람에 내민 작은 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소녀가 일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녀의 손은 일준보다 더 작았다.

작은 두 아이는 숨을 조금씩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 끝에는 꽤 뛰어 놀기 좋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일준은 공원 위쪽 오르막길에 비스듬히 늘어선 벽돌건물들의 불빛을 보았다. 그새 앞서 나간 소녀가 별안간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소녀가 향한 곳은 첫 번째 건물의 1층이었다.

“두류 이발소.”

문이 닫히고, 소녀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문의 흔들림이 잦아드는 것을 보며, 일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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