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방아집 딸(1)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1.02.18 15:52 의견 0

연자방아집 딸(1)

1918년 일제시대, 이연실은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상사창리(지금은 하남시 상사창동)에서 큰 연자방아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소문으로는 천석꾼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오백석 논을 가진 아버지 이종량의 집 마당에는 대형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나귀 두필이 끌어 곡식을 빻는 아주 큰 돌방아였습니다. 이씨는 광주유수를 지낸 이덕신의 손자인데 공부를 잘하는 맏딸 연실이 광주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일본인 교장의 추천을 받아 일본아이들이 많이 가는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일본고관들의 딸이 많이 다니던 학교였지만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자 이씨는 딸의 비범한 성격과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1937년 동경의 고등사범 여자부에 보내기로 마음 먹고 도지사 추천서를 받기위해 일본인 군수에게 청원을 하러 갔습니다.

군수는 우리 광주에서 여성 인물을 한사람 내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흔쾌히 동의, 경기도 지사의 추천장을 받아 주었습니다. 이연실이 동경으로 떠나는 날, 군수는 젊은 일본인 직원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연실이를 동경에 데리고 가 기숙사에 무사히 입사하도록 보살펴 주라고 배려했고 마을 젊은이들은 가마를 메고 와 연실이를 광나루까지 태워가 강변에서 국밥을 끓여 연실이에게 먹여 전송했습니다. 연실은 동네 오빠들의 기대와 성원에 꼭 보답하겠노라고 약속하고 배에 올라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항에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긴 여행 끝에 동경에 도착했습니다.

문중의 어른들은 종량씨에게 집안일과 침선을 가르처 시집 보낼 생각은 안하고 여자가 무슨 동경유학이냐고 혀를 찼지만 종량씨는 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총독부의 여성관리가 되는 날을 꿈꾸며 묵묵히 학비를 송금했습니다. 때는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중국 본토로 대 병력을 진입시키던 1937년,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고, 연실이 졸업을 하던 1941년에는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과중한 전쟁부담으로 일본이 점점 파멸로 기울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탁월한 실력의 이연실을 일본정부는 그냥 조선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전쟁 최고 지휘부인 대본영 직할 특수 정보부대에 배치했습니다.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전투중 포로가 된 미군을 심문하고 군사정보를 탐지하는 일도 했고 여자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을 거쳐 미국 하와이로 잠입하여 태평양사령부의 요인과 인맥을 만드는 일도 해야하는 등 이연실 대위(일본명 야마시다쥰코 대위)는 1945년8월 전쟁이 끝나도 일본정부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광주의 종량씨는 가끔씩 받아보는 딸의 편지를 몇번씩이나 읽으며 전쟁이 곧 끝날 것이고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이 될것이라는 딸의 편지에 마음을 졸이며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종량씨의 부인은 병으로 자주 자리에 누웠는데 동경으로 공부하러 떠난뒤 한번도 집에 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나라의 큰 일을 한다는 딸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죽겠다며 영감에게 딸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매일 조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수 없어 그저 곧 온다고만 했습니다.

패전하고 항복한 일본에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동경시내 중심가에 사령부를 설치한 맥아더 장군은 처음부터 천황과 내각에 매우 유연한 태도를 보였고 시간이 나면 일본의 전통 다도와 음률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군의 대 공습으로 절반 이상이 파괴된 동경의 재건을 위하여 군장비의 투입을 명하는등 일본에 친근감을 보이는 맥아더를 보고 저사람이 일본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을 내기도했습니다.

연실은 패전 내각의 필요에 의해 점령군사령부(GHQ)에 배속이 되었고 사령관실 부속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단정한 용모와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은 곧 맥아더 사령관의 눈에 띄었고 그녀가 조선반도 출신임을 알게 되자 미 육군 소령으로 전시 현지 임관되었습니다. 더 이상 일본내각이 그녀의 신분과 임무를 간여할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워싱턴에서는 빨리 부대를 조선반도에 보내 소련군이 점령하기 전에 장악하라고 지시가 왔지만 맥아더는
거기도 일본땅이므로 따로 부대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소련군은 감히 내게 덤비지 못한다,
고 하며 미적거렸습니다.

천황이 사령부로 맥아더를 예방하는 날, 사령부 현관에서 천황을 영접해 사령관실로 안내한 사진속의 동양여성 소령이 바로 연실입니다. 맥아더는 천황이 집무실에 들어와 90도 각도로 절을 하자 소파에서 엉덩이를 반쯤만 일으켜 자리를 권했습니다. 이 치욕적인 장면을 일본국민들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연실의 완벽한 통역하에 25분의 면담이 끝났습니다. 천황은
전쟁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를 처형하고 나의 신민은 살려 달라, 잿더미 속에서 신민들이 굶고 있으니 식량을 지원해 달라,
고 읍소했고 맥아더는 이소령에게
일본왕이 인격이 훌륭하다, 샌프란시스코에 식량수송 선단을 요청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대경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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