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방아집 딸(2)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1.02.18 15:58 의견 0

연자방아집 딸(2)

일본이 항복한지 20여일이 지나도 조선반도에 부대를 진입시키지 않고 동경에 앉아 전쟁복구와 일본문화에만 관심을 보이는 맥아더장군에게 어느날 연실은 조언을 합니다. 조선이 36년간이나 일본의 노예상태하에 있었고 카이로 선언 대로 독립국으로 새 출발을 하도록 장군께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좌우 이념대립을 가라앉히고 민주주의 훈련을 시켜 새로운 정부가 서도록 장군께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맥아더는 오키나와의 미제24군 사령관 하지중장에게 휘하 부대를 지휘해 조선으로 들어가라고 9월8일 출동명령을 내립니다. 하지 중장은 그때까지도 조선을 통치하던 일본인들의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켜 일본으로 내보내고 3년간 군정사령관을 하다가 1948년 총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한국정부를 출범시키고 귀국합니다.

광주의 연자방아집 종량씨의 부인이 딸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하고 타계하던 해, 환갑을 맞은 종량씨는 쌀섬들과 중요 가재를 마차에 싣고 가솔들을 데리고 북의 김일성 군대를 피해 남쪽을 향해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일본사람도 물러가고 미국사람도 물러가고 새로이 대한민국 정부를 세워 국가가 새출발을 한지 2년도 안되어 동족상잔의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왜정때 보다 훨씬 더 잔인한 부모형제의 가슴에 총을 쏘고 칼을 꽂는 무도한 전쟁,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서울에 맥아더 사령부 요원들과 합께 이연실이 10여년만에 돌아왔습니다. 미군은 영어를 잘하고 일본어와 한국어가 능통한 이연실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에 공감하고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원폭사용을 워싱턴에 건의하다가 해임당하고 귀국합니다.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있던 사창리 사람들이 미군 고급장교가 되어 나타난 연실을 에워싸고 환호를 했습니다.
연실의 지원으로 전쟁이 끝난 광주 사창리에 농로와 수로를 복구하고 파괴된 마을 집들을 다시 손보는 삽질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집니다. 피난갔던 종량씨가 돌아와 마을 재건의 중심이 되었고 전답을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배정하고 앞으로 3년간 소작료 없이 무상으로 경작하라고 하였습니다. 포격에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거대한 연자방아도 다시 수습하여 마을 입구에 세워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연실은 미군에서 전역, 주한미대사관에서 일하며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유솜)의 특별 지원을 받아 고향 마을을 복구, 훗날 이 일대가 하남시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열아홉살때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는 연실을 광나루까지 나와 전송해 주던 마을 오빠들에게 약속한 대로 보답을 했습니다. 연실은 그후 대사관의 마이클 크로포드 영사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고 아리조나주의 남편 고향 목장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무슨 인연인지 그녀의 손자가 미공군 조종사가 되어 수원비행장에 배속되어 왔습니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광주 사창리 집의 뒤뜰 땅속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큰 철제 불상(국립박물관소장, 광주 철불 또는 상사창리 철불이라고 함)이야기와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이 지은 절 용주사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하면서 주말이면 용주사에 옵니다. 영어를 잘하는 신도회장 무량심 보살이 이 젊은 미군 조종사를 무척 좋아해서 자기 손자처럼 먹을 것을 챙겨줍니다. 그 미국청년은 죽은 할머니 이연실과 백발의 무량심이 얼굴이 매우 닮아 시스터 같다고 말했습니다.
대경거사.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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