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무라(MOORA) 작가님 첫번째 이야기 1-5

[RED 빨강 이야기] 1-5. 이발소 딸의 이름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0.12.24 13:19 | 최종 수정 2021.06.17 18:10 의견 0

[RED-빨강 이야기]

무라(MOORA)

감기가 다 낫는 동안에는 거의 다락방에만 있었으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일준은 몇 번이고 밖에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열 번이면 열 번 다 할머니한테 들키는 바람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질릴 지경이었던 만두도 먹고 싶고 친구들과 오락도 하고 싶었다.

여전히 소녀 생각이 나곤 했지만 여전히 만날 길이 없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소녀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처음 그 생각을 했을 때, 일준은 자기 머리를 몇 번이라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놓고도 이름을 물어보지 않다니,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있는지 말이다.

일준은 주방으로 내려갔다. 된장국 냄새가 났다.

“할머니,”

“안 된다고 했다.”

아직 얘기도 안 꺼냈는데 안 된다는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일준은 잠시 풀이 죽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일준은 할머니 손을 붙잡고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제 열 안 난다니까?”

일준은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잠시 가만히 열을 재더니 냄비의 물이 끓자 손을 뺐다.

“그럼 요 앞에서만 놀아라. 멀리 가지 말고.”

할머니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어 끓는 물에 된장을 풀면서 저녁 먹기 전까지는 돌아오라고 덧붙였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준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바깥 공기인지. 일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날이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당장이라도 공원까지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할머니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오늘은 돈도 없으니 만두도 사 먹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시장조차도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준의 발걸음은 이미 시장, 정확히는 시장 너머 공원을 향해 있었다. 북적거리는 오후의 시장바닥을 뒤로 하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침내 공원에 도착하여 곧장 이발소로 향했다. 저번과는 다르게 이발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도 잠겨 있었다. 일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걸려있던 일준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비 오는 밤에 어렴풋이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일준막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일준은 천천히 읽었다.

“두류 제1구역… 재개발… 결사반대.”

재개발이라. 일준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할머니가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선인장이 하나 떠오를 뿐이었다.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린 것처럼 이파리가 길게 자라는 풀이었다. 그 끝에는 분홍색 꽃이 피었다. 할머니는 그것이 개발선인장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재개발은 아무리 생각해도 뜻 모를 단어였다.

일준은 바람에 펄럭이는 일준막을 한참 쳐다보다 왠지 모르게 빨갛고 두꺼운 그 글씨에 기가 눌려 걸음을 옮겼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건물 뒤쪽으로 들어가자 해가 들지 못하는 습하고 어두운 골목이 나왔다. 아무래도 비교적 높은 상가건물의 그림자 때문인 것 같았다. 이따금 역한 냄새가 났다. 일준한테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반지하로 된 집들이 굉장히 많았고 높아봐야 2층짜리 조그마한 주택이나 빌라밖에 없었다. 문조차 없어 커튼으로 대충 가린 집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 안에서는 오래된 라디오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외벽에는 아까 봤던 것과 비슷한 일준막들이 걸려있었다. 계속해서 걸어도 비슷하게 생긴 집들의 연속이어서 잘못하다가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일준의 동네는 뻥튀기 소리, 확성기로 중고 가전제품을 광고하는 소리 등등, 시장에서 나는 소리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에 조용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게다가 산속이라 그런지 벌레도 많았다.

일준은 문득 몸을 떨었다. 어느새 막다른 길이었다. 철제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어김없이 일준막이 걸려있었다. 재개발이 도대체 뭐라고 저렇게 무섭게 일준막까지 거나 싶었다.

‘다시 돌아갈까, 돌아가서 된장국에 밥이나 말아먹고 잠이나 잘까?’

일준은 걸어온 길을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르지만 벽만 잘 짚고 가다 보면 결국 밖에 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몇 번째 꺾은 골목인지 모르는 길 가운데, 일준은 이상한 광경을 마주했다. 순간 너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낮은 담 뒤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분명 벽돌 대문 지붕 위에 사람이 있었다. 일준은 고개를 내밀었다. 대문의 지붕은 평평한 편이라 사람이 올라가도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사람이 있을 줄이야! 누가 봐도 지붕을 수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지붕을 수리하기에는 너무 몸집이 작아 보였다. 어디서 주웠는지 모르는 더럽고 찌그러진 양동이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위태로웠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 집중한 표정은 분명 낯이 익었다.

소년이었다. 일준은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겨 그가 꾸미는 짓을 지켜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어떤 어른이라도 보고 호통을 치면 꼴 좋을 텐데. 하지만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고 지나가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소년은 이따금씩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마다 일준은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들킬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일준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별안간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년도 들렸는지 벌써 몸을 납작하게 숙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꽉 붙잡은 양동이만 보였다. 이러면 지나가는 누구라도 소년이 있는지 알아차릴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점차 가까워지는 실루엣을 확인했다.

소녀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승재?’

일준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아무리 봐도 승재였다. 평소에 자주 입는 개나리색 점퍼를 입고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어째서 소녀와 함께 있다는 말인가? 일준은 소녀와 승재, 그리고 여전히 지붕 위에 납작 엎드린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소년이 올라타 있는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은실아, 잘 가.”

승재가 말했다. 그러자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너도 잘 가.”

일준은 그 대화를 놓치지 않고 전부 똑똑히 들었다. 은실, 이름이 은실이었구나.

예쁜 이름이다, 하고 생각할 즈음 은실이 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일준은 몸을 찬찬히 일으켜 양동이를 드는 소년과, 그런 소년의 짓궂은 표정과, 뒤이어 양동이가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차 싶었다. 알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양동이가 은실이 있는 쪽으로 넘어지고, 그 안에 들어있던 물이 쏟아져 내릴 때, 일준은 자기도 모르게 숨어있던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안돼!”

그런 외마디의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차 싶었다. 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찰나에 은실의 깜짝 놀란 표정을 봤던 것도 같다.

얼만큼 시간이 지나고 정적 사이에서 눈을 떴을 때, 모두가 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털썩 주저앉은 은실과, 인상을 찌푸린 채 자기를 노려보는 소년과, 마지막으로 머리카락과 웃옷이 젖은 채 적잖게 놀란 듯한 승재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준은 허겁지겁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꼬부라진 뒷골목을 빠져나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류산을 내려오며, 일준은 그 동네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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