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의 뿌리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0.10.27 22:29 | 최종 수정 2020.10.31 21:03 의견 0
 

윤석열 검찰총장의 뿌리를 찾아보자!

윤총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충암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 출신이고 일본 유학후 연세대에서 응용물리학 교수를 지내신 윤기중씨이고 
모친은 이대에서 강의를 하신 교수 분이시다

충청남도 논산의 노성지역 파평윤씨 가문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양반 가문이다. 노성은 이들 파평윤씨 노종 5방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 유서와 전통이 살아 있는 곳으로, 

특히 이곳에 집중되어 분포한 종학당과 병사, 선영과 영당, 서원과 정려, 종가 고택 등은 조선시대 호서 지역 양반들의 유교 문화를 빠짐없이 접할 수 있는 문화 자원이다. 

파평윤씨가 충청남도 논산 지역 노성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승지공(承旨公) 윤돈(尹暾, 21세손)이 1540년경 처가가 있는 곳으로 이거하면서부터였다.

윤돈은 59세의 일기로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尹昌世, 22세손)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지금의 노성면 병사(丙舍) 비봉산(飛鳳山) 자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가 병사리에 터를 잡게 된 까닭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서모(庶母)와 아들이 없는 장모까지 한 집에 모셨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이곳이 처가의 전장(田莊)이 있던 곳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후 윤돈 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성 5방파가 파생되었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설봉공(윤수), 문정공(윤황), 충헌공(윤전), 서윤공(윤흡), 전부공(윤희)의 5방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5방파의 형성시기인 16~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가가 흔들리는 혼란기로서 노종 5방파 인물들은 척화운동을 주도한 척화가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이를테면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척화상소 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황의 아우 윤전(尹烇)은 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의 처 공주이씨는 강화에서 역시 자진(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윤황의 슬하에 성장한 8형제 모두가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윤훈거, 윤순거, 윤상거, 윤문거, 윤선거, 윤민거, 윤경거, 윤시거이다. 이들 중 윤문거는 김집(金集)의 제자로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사직함으로써 명예에 초연한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문정공 윤황(23세손)은 당대의 명유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면서 학자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성혼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학통을 계승하는 수제자가 되었다.

윤문거(1606~1672)는 윤황의 넷째 아들이다. 163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에는 정언이 되어 청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평생 학문에만 뜻을 두었으므로, 기품과 학문과 덕이 높아 사림들의 추앙을 높이 받았다. 평상시에는 석성에 거주하다가 1672년에 병사리 재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682년에 노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윤선거(24세손)는 송시열·송준길과 더불어 ‘충청5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로, 윤황의 다섯째 아들이자 석호 윤문거의 아우이다. 20세에 이미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성리학에 힘쓰며 호서사림의 종장인 김집에게 사사하여 예론에 정통하여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후에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이로써 노소분파(老少分派)의 단초를 이루었다.

명재 윤증(25세손)은 윤선거의 아들로서 어려서는 시남(市南) 유계(兪棨)에게 학문을 배우고..윤증 고택을 남길 정도로 친밀하다

이런 집안의 34세손이 윤기중이고 그 아들 35세손이 바로 윤석열총장이다..병자호란 때에도 중국과 싸우자고 했던 집안의 자손이다

조금만 머리를 숙이면 명예와 풍요가 보장되는데도 예수님처럼 고난의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딱하면서도 자랑스럽다

 

월간조선 . 동아. 특집기획팀. 김학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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