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이야기]
무라(MOORA)
“웬일로 심부름을 한다고?
할머니가 허리를 굽힌 채로 물었다. 일준은 문지방에 올라서 중심을 잡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혼자서 자주 하는 놀이였다. 발꿈치를 띄우고 있어 종종 휘청거렸고 그때마다 문지방에서 소리가 났다.
“응?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
“할머니 힘들까 봐 그러지.”
“문지방 밟지 말어.”
일준이 문지방에서 내려와 할머니의 옷을 잡고 매달렸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갔다 온다?
“늦게 들어오지 말고, 후딱 사서 들어와라.”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준은 식탁 위의 지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만두가게를 지나칠 때 일준은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딱 한 번 보았지만 벌써 그리운 마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만남이었다. 하지만 멀어져갔던 소녀를 잡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일준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어떠한 기약 없이 그냥 보낸 것을 후회하곤 했고 이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도 빠지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체념하는 속에서도 왜 저도 모르게 소녀를 보고 싶어하고 기다리고 있는지 스스로도 마음을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다 마음에 병이 나겠다 싶었다. 그럴수록 일준은 밖에 자주 나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거리를 찾았다. 친구들과 약속이 없는 날에도 시장에 나가서 고기만두를 샀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씹으며, 먹을 때까지 시장 바닥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 가까이 지났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다가 한편으로는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애가 타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날이 지날 때마다 소녀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졌다. 이러다가 까먹을 것만 같았다. 그냥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나을까 싶은 적도 있었다.
두류 이발소. 일준은 그 색 바랜 간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작지만 외관이 쓸데없이 번쩍거리는 방앗간이 하나 있다는 것도. 분명 할머니는 시장 근처의 값싼 식료품 소매상을 생각하고 심부름을 맡겼을 것이다. 웬만한 먹을 것들은 다 그곳에서 사왔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소매상 주인이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 가격을 깎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준은 시장을 지나쳐서 두류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한적했다. 밤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적당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높고 파란 하늘 때문인지 평화롭기까지 했다. 일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멀리서 봐도 두류 이발소 간판이 한눈에 보였다.
만나면 뭐라고 인사할까. 그 아이를 불러내야 할까. 고춧가루를 사러 왔다가 생각이 났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 돈을 이발하는데 써버릴까. 돈이 되긴 할까.
이미 할머니의 심부름은 잊은 지 오래되었다. 이발소에 가까워질수록 일준은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더욱 느꼈다. 그때의 소녀처럼 자꾸 땅바닥만 보며 걷게 되는 것을, 겨우 고개를 치켜들어 걸음을 빨리 했다. 우선 창문 너머로 이발소 안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희미한 풍경종의 소리. 이발소의 문이 열렸다. 일준은 어쩔 줄 모르다가 황급히 나무 뒤에 숨었다.
소녀였다. 일준은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소녀가 먼저 바깥으로 나올 줄이야! 어찌됐든 더 다가가기 수월하게 됐다. 굳이 수상하게 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일준은 생각했던 대로 태연하게 소녀를 부르거나 다가갈 수 없었다. 오히려 소녀를 본 순간 굳어버렸다.
정확히는 소녀 뒤로 따라 나온 소년을 보고 굳어버린 것임이 분명했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자신의 낡은 슬리퍼를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자기보다 멋져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보기에 일준과 동갑이거나 한 살 정도 많을 것 같았다. 소년은 일준보다 조금 더 큰 체격을 가졌다. 잘 빗은 머리카락은 정돈되어 있었고 이목구비도 크고 뚜렷한 편이었다. 입은 옷도 꽤나 멋져 보였다.
소녀의 표정이 환했다. 그들의 말소리가 일준의 귀에 들려왔다.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저 애와 있어서 즐거운 모양이구나, 하고 일준은 생각했다. 그러니 더 자신이 없었다. 소녀 앞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부끄러웠고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일준은 쭈그리고 앉았다. 그나마 조금씩 들렸던 둘의 말소리마저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오지 말 걸.’
일준이 한숨을 폭 쉬었다. 그때 일준의 그림자 위에 또 하나의 긴 그림자가 겹쳤다.
“여기서 뭐해?”
일준은 깜짝 놀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를 휙 돌아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소녀였다. 일준은 잠시 시선을 소녀의 뒤로 옮겼다. 소년이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 그냥.”
일준이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그냥?”
소녀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일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으응 심부름 땜에 고춧가루 사러…”
“우리 아부지 가게에 가는 거였구나?”
갑자기 소년이 일준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내심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 방앗간집 아들이구나. 일준은 내심 기가 죽어 고개만 끄덕였다. 방앗간집 아들이 싱긋 웃었다.
“나 따라와.”
소년이 명령조로 말하곤 휙 돌아섰다. 일준은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갔다. 소녀가 일준을 앞서 달려나가더니 방앗간집 아들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둘은 그 잠시동안에도 자기들만의 얘기에 빠져 수다를 떨었다.
일준은 방앗간집 아들이 자신을 향해 지었던 웃음을 떠올렸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방앗간집 아들이 소녀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은 일준이 소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유사할 것이었다. 확실했다. 일준은 내심 불안해졌다. 방앗간에서 얼마를 주고 어떻게 고춧가루를 사서 나왔는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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