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빨강 이야기]
무라(MOORA)
익숙한 길이었다. 일준한테는 이전에 소녀와 함께 걸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일준은 소녀가 보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으쓱해졌다. 어느새 동네의 익숙한 거리와 멀어지고, 길목이 더 어두워지다 못해 깜깜해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겁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두 아이는 오르막의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땅은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문득 일준의 볼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일준이 손등으로 볼을 닦아냈다. 승재도 빗방울을 맞았는지 흠칫하며 일준을 바라보았다.
“비 와!”
일준이 소리쳤다. 어쩌면 담력체험을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비가 많이 내려서 못하게 된다면 더 좋았다. 승재의 걸음이 빨라졌다. 일준도 승재를 따라 걸음을 빨리 했다. 승재는 꼬불꼬불하고 어두운 길을 헤매지도 않고 잘도 올라갔다. 승재한테는 익숙한 길인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일준은 신발창이 미끄러워 자꾸만 뒤쳐졌다. 그럴 때마다 승재는 걸음을 멈추고 일준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예상한 대로 처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삽시간에 소나기로 변했다. 빗소리가 꽤나 거셌다. 둘은 깜짝 놀라 오르막길을 무작정 달렸다. 모두 흠뻑 젖어갔다.
두류공원에 도착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앞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저 상가 불빛들 중 두류 이발소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조그마한 덩굴지붕 밑으로 피신해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겨우 둘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다 젖어서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붙어 앉아야 했다. 지붕 밑으로 물이 조금씩 샜다. 하지만 밖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아서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전보다 더 춥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푹 젖어 달라붙는 옷 때문에 몸에 덩굴 줄기가 닿을 때마다 따갑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 일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승재는 젖은 옷과 머리를 마구 털고 있었다.
“그런다고 마를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걸.”
일준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승재 말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옷을 다 벗어버릴까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기가 무섭게 승재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벗은 옷을 꽉 쥐어짜니 물이 줄줄 흘렀다. 기다렸다는 듯 일준도 우아, 하고 소리치며 웃옷을 벗었다. 승재는 한술 더 떠서 바지까지도 벗어 던졌다. 일준이 승재의 다 젖은 팬티를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승재가 씩 웃더니 일준의 바지를 쑥 내렸다. 으악, 하고 일준은 주저앉아버렸다. 승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보고 깔깔 웃었다. 팬티는 이내 흙투성이가 되었다. 덩굴지붕 아래 두 아이들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팬티바람이 되어버렸다. 한 번 크게 웃음이 터지니, 그 뒤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추운 빗속에서 얼마나 웃으며 서로에게 물을 짜며 놀았는지 몰랐다. 이 상황이 즐거워 일준은 날이 꽤 추운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그러다 돌연 지쳐버린 두 아이는 비가 그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기로 했다. 승재는 춥다고 하면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일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 지붕 아래서는 두류 이발소가 있는 건물이 한눈에 보였다. 일준은 그곳의 흐린 불빛을 한참 응시했다. 바람이 매섭게 흔들리는 일준막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담력시험은 다음에 할까?”
별안간 승재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듣던 중 반가운 의견에 일준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나 배고파.”
“그리고 추워.”
“오늘은 그냥 집 가자.”
일준이 구부정하게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날이 어두워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를 달달 떨면서도, 일준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산밑으로 내려와 대로변을 걷던 두 어린아이는 깜짝 놀랐다. 이미 동네에서는 일준과 승재를 찾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려던 참이었다. 원래 시장 후문 쪽은 알전구의 약발이 다 된 이후로 한 번도 새 것으로 갈지 않아서 밤이 되면 뒷골목처럼 어둡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시장 후문 쪽이 밝은 듯싶었다. 사람들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불빛을 보고, 둘은 앞다투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꾹꾹 눌러왔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커진 탓이었다. 승재는 아예 엉엉 울고 있었다.
“저기 온다!”
시장 후문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저 멀리서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건어물집 아저씨와 당구장 할아버지도 뒤이어 달려 나왔다.
“할머니!”
일준이 할머니 품에 안겼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겨! 세상에, 이렇게 다 젖고는,”
할머니가 일준의 엉덩이를 연신 때리더니 말을 다 잊지 못했다. 일준은 너무 아팠지만 한기가 몰려와서 평소처럼 잽싸게 피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왔다. 할머니가 일준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우산을 씌워주었다. 이따금 어깨가 따가웠다. 아까 옷을 벗고 좁은 덩굴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을 때 긁힌 것 같았다.
“요녀석들! 아주 그냥 겁도 없어, 응?”
건어물집 아저씨가 일준의 젖은 머리를 손으로 막 쓸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서 일준도 그만 배시시 웃고 말았다.
“뭘 잘 했다고 웃냐, 웃기는.”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안도했는지 일준을 꼭 안아주었다.
“애들 다 무사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장 불빛이 완전히 꺼지고,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하나 둘 돌아갔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인사로 하지 못한 채, 각자의 부모의 손에 이끌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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