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희12_청주_미호천인근마을_00339
[RED-빨강 이야기]
무라 (MOORA)
오직 다짐했을 뿐이었고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곳은 일준한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이 어렵지, 그곳에 두 번, 세 번 가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준은 두류공원 뒷골목에 자주 놀러갔다. 상가 뒤에 주거단지로 빠르게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던 것이다. 초록색 펜스가 입구에 설치되어 있어 막힌 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힘을 주어 밀면 문처럼 열리는 방식이었다.
이제 그곳은 일준한테 낯선 곳이 아니었다. 두류공원의 커다란 상가건물 뒤로 난 뒷골목이 총 3열로 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일준은 은실과 승재가 한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됨과 더불어, 승재가 점차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승재가 보이지 않았고, 집 앞에 찾아오는 일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도 알 도리가 없었다. 전보다 승재를 만날 기회가 적었고, 어찌어찌 만났다 하더라도 승재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잘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일준은 승재에게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얼마간 은실과 붙어 다녔던 소년 또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양동이 사건 이후부터 그랬다. 보인다고 하더라도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발을 구르며 일준의 시야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그게 아니면 툭하면 방앗간 안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은실은 소년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에 그런 장난 많이 당했다.”
“왜?”
“내가 다른 애하고 노는 걸 걔가 싫어해서.”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리고 엄청나게 부자야.”
“그걸 어떻게 알아?”
“몰라. 아빠가 부자라 했어.”
“거짓말일 거야.”
일준이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걔가 힘이 더 세.”
은실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얘기를 들어보니 둘은 친했지만 은실이 소년한테서 은근 짓궂은 장난과 괴롭힘을 종종 당했던 모양이다. 일준은 마음이 아팠다. 자기라면 은실을 더욱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을 것이고 짓궂은 장난 같은 건 치지 않았을 것이다.
일준은 소년이 창피해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몹쓸 장난을 하는 것을 자기한테 들켜버렸으니 말이다. 둘이 마냥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내심 우쭐하기도 했다. 마치 악당한테서 공주를 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일준과 은실이 친해지기 쉬운 조건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은실은 일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승재가 알려주었을 것이라고 일준은 어림짐작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했던 은실은 혼자 노는 게 익숙하지 않았고 일준은 혼자 놀아도 괜찮을 만큼 재미있는 놀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은실에게 일준은 호기심 대상이기도 했다. 이곳에 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은실에게 어렵사리 접근한 일준을 은실이 반기면서 둘의 연이 본격적으로 싹을 틔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준은 은실의 긴 머리카락을 정말 좋아했다. 한 번은 할머니한테서 여자아이의 머리 땋는 법을 배워왔다. 둘은 도로경계석에 쭈그려 앉았다. 일준은 서툰 솜씨로 은실의 까만색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하면 할수록 모양이 나름 예쁘게 나왔다. 머리를 땋았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일준은 은실에게 퀴즈를 내기도 했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은실은 처음에는 박수까지 치면서 열심히 반응했다. 나중에는 일준이 머리를 손으로 계속 빗고 만져주니 나른해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기온이 눈에 띄게 떨어지면서, 두류공원의 반지하동네에도 점차 견디기 힘든 추위가 찾아왔다. 가뜩이나 볕이 잘 들지 않으니 살얼음도 잘 얼었고, 온 골목마다 냉기가 꽉꽉 들어차 빠지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손이 꽁꽁 얼어 밖에서 놀기 곤란했다.
둘은 조금 더 따뜻한 곳을 찾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서로의 집을 떠올렸지만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다. 은실에게는 술만 마시면 돌아버리는 무서운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한테 맞곤 하는 오빠가 있었다. 은실의 아버지는 오히려 술을 마시면 은실을 더욱 아끼고 애정 표현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것을 질투했던 오빠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은실을 은근히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적도 있던 모양이었다.
“옛날엔 오빠 미웠는데.”
“지금도?”
“아니, 지금은 좋아!”
은실이 말했다.
일준한테는 두류공원 반지하동네라면 질색하며 싫어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은실을 집에 데려가면 얘가 누구이고 어디 사는지를 다 물어볼 텐데, 그러다가 두류공원 뒷골목에 산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날은 아마 호되게 혼나는 날이 될 것이었다. 그것만은 안되었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놀자.”
문득 은실이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말 있어?”
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은실이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일준은 왠지 모를 기대감에 차 은실의 뒤를 따랐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볼이 빨개진 두 아이가 떨며 도착한 곳은 낮은 담과 날카로운 덤불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초가였다. 은실이 낡은 대문을 힘껏 밀었다. 대문은 무엇인가에 걸린 듯 덜컹거리며 잘 열리지 않았지만 일준까지 힘을 모으니 겨우 사람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열렸다. 둘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약간 스산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준은 아무래도 좋았다. 은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집 안은 흙먼지와 이따금 기어다니는 벌레들이 있을 뿐 꽤 따뜻했다. 둘은 나란히 대문간에 앉았다. 그리고 창호지가 뜯겨 구멍이 숭숭 뚫린 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나도 재미있는 놀이 하나 알아.”
은실이 침묵을 깼다.
“알려줘.”
“엄마 아빠 놀이!”
은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은실과 엄마 아빠 놀이라니, 일준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그럼 내가 엄마야.”
“으응.”
“여보, 오늘 저녁에 맛있는 요리 만들어 줄게요.”
은실이 엄마 말투를 흉내 내어 간드러지게 말했다. 일준은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네, 좋아요. 무슨 요리요?”
“파구이요.”
은실이 말했다. 일준은 깜짝 놀랐다.
“파구이요?”
“네에.” 은실이 답했다. “파 구워 먹으면 단물도 나오고 진짜 맛있답니다?”
“우와, 진짜?”
일준은 순간 놀이 중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흥분해서 물었다.
“응, 진짜!”
은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일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구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은실의 미소 때문인지 헷갈렸다. 확실한 건, 지금 은실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나도 먹고 싶어.”
일준이 말했다.
“그럼 여보는 요 앞 텃밭에서 파 몇 개만 갖다 주세요. 저는 주방에 갈게요.”
은실이 다시 상황극에 몰입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안에서 불을 피우는지 탁탁, 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일준은 심장이 쿵쿵 뛰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여보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런 건 어른들이 하는 말인데.
일준은 이런저런 잡풀들이 많이 자란 텃밭으로 나갔다. 어느 게 파이고 그냥 풀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파처럼 보이는 것들을 몇 개를 캐기 시작했다. 그새 손이 꽁꽁 얼어서 빨개졌다. 콧물도 났다. 안에서 은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캐다 보니 요령이 생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흙을 파내다가 손끝이 긁히는 줄도 모르고, 일준은 열심히 파를 캤다.
파를 잔뜩 캐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발갛게 불이 들어온 아궁이 안을 살피는 은실의 작은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커다란 나무막대기를 꽉 잡고는 아궁이 안을 열심히 들쑤시고 있었다. 나무막대기의 표면은 상당히 거칠어서 손에 상처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준은 은실에게 파를 건넨 다음 나무막대기를 받았다. 그리 세지는 않지만 불이 나름 잘 타오르고 있었다. 파를 고르는 은실 옆에서 일준은 열심히 아궁이 안을 쑤셔 불이 잘 타오르도록 했다.
둘은 아궁이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파를 굽기 시작했다. 매운 냄새가 나서 기침이 났다. 은실이 잘 구운 파를 일준한테 건넸다. 일준이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파를 호호 불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살짝 알싸하지만 그 끝에 단 맛이 돌아 은근 중독되었다. 특히 파의 하얀 부분에서 단 맛이 더 많이 났다.
“진짜 맛있다!”
“내 말이 맞지? 맛있다니까!”
은실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파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조금 뜨거운지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둘은 양이 얼마 없는 파 몇 뿌리를 금새 다 노나 먹었다. 나름 배가 불렀다.
“나 이제 학교 가.”
대뜸 은실이 말했다.
“학교? 언제?”
“그건 몰라. 백 밤만 자면 된다고 오빠가 그랬는데.”
“백 밤이나?”
일준은 이제껏 학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할머니한테서 얘기를 들은 것도 없었다.
“우리 이제 여덟 살이니까 학교 가야 돼.”
“그래. 그럼 나도 갈 거야.”
일준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은실이 가는데 자기라고 못 갈까? 할머니가 아직 얘기를 안 꺼냈을 뿐, 분명 나이가 같으니 학교에도 같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일준은 생각했다.
“학교에 가려면 입학식을 해야 돼.”
“맞아. 나도 알아!”
일준이 맞장구 쳤다.
”입학식 할 땐 이름표가 있어야 돼. 리본도!”
“우와, 리본도 매?”
“그래. 우리는 빨간색 리본이 있어야 해. 그리고 이름표는… 명찰이야. 명찰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도 써야 돼. 그래서 나는 이름 예쁘게 쓰려고 글씨도 연습한다?”
은실이 손가락으로 잿밥 깔린 바닥에 리본 모양을 그리며 조잘조잘 말했다. 평소에는 저렇게까지 말이 많지 않은데, 많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일준은 눈을 마주치며 은실이 하는 말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빨리 학교 가고 싶어. 오빠가 너무 부러워.”
그 말을 끝으로 은실이 일어섰다.
“학교 가면 내년에는 맨날 볼 수 있겠다.” 일준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 학교 같이 가자.”
일준의 말에 은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 학교에 가서도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헤어지기 전에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저작권자 ⓒ 한국소비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