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_자연_눈16
[RED 빨강 이야기]
무라(MOORA)
첫 함박눈이었다. 눈 내리는 날은 더 따뜻하다더니 정말로 그러했다. 공기가 찼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서, 일준은 이른 아침부터 창문을 열어젖혔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동네 풍경은 일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따금씩 창문턱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일준은 의자를 창문 쪽으로 끌어 놓고 그것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혓바닥을 죽 내밀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눈을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어떻게 혓바닥으로 쉽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발뒤꿈치까지 든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한 번 정도는 혓바닥 위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이 녀석이, 위험하게!”
언제 올라왔는지, 할머니가 일준의 팔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리고 창문을 닫은 뒤 걸쇠까지 걸어 잠갔다. 창문 걸쇠는 녹슬어서 한 번 힘주어 걸면 쉽게 잠금을 풀기 힘들었다. 일준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할머니를 따라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문득 은실도 눈을 먹어보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일준은 오늘 은실을 만나면 한 번 물어보겠다고 다짐했다.
*
“눈 먹은 적 있어?”
“아니?”
은실이 말했다. 만두가 뜨거운지 호호 입김을 불자 은실의 조그마한 입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나는 오늘 눈 먹어봤다?”
일준이 신이 나서 말했다. 은실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은실의 관심은 온통 먹고 있는 고기만두에 가 있었다. 일준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신발코로 흙장난을 치는 등 괜히 딴청을 피웠다.
“만두 맛…”
“눈 맛있어?”
화제를 돌리려던 참이었는데, 대뜸 은실이 먼저 물었다. 그리고 길바닥에 잔뜩 쌓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제설기로 길목 구석에 밀린 눈이었다.
“나도 먹어볼까?”
“아냐, 만두가 더 맛있어.”
일준이 손사래를 쳤다.
“그건 나도 알아.” 은실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나도 먹고 싶어.”
“근데 저렇게 쌓여 있는 건 안돼. 더러우니까.”
“맞아. 근데 그럼 어떡하지?”
은실이 남은 만두를 입에 넣고는 오물거렸다. 일준과는 다르게 은실은 만두 하나를 먹어도 참 오래 걸렸다. 조금씩 베어 물고, 꼭꼭 오랫동안 씹어 삼켰다.
“음, 그럼 나를 따라해봐.”
“응.”
은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한테 집중하는 은실의 모습이 일준은 정말 좋았다.
”일단 눈이 오면 하늘을 보고,”
일준 하늘을 보자 은실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셨다.
“혓바닥을 내밀어.”
“바보 같다.”
은실이 킥킥 웃으면서도 일준을 따라 혀를 내밀었다.
“되게 웃기다.”
“그래?”
“응. 눈이 안 오니까.”
웃음을 참지 못한 은실이 일준을 보며 말했다. 일준도 그만 두고는 은실을 따라 웃었다. 사실 일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모습이 웃기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내리는 눈을 먹기 위해서라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은실이 웃기다고 하면 정말 웃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 일준으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일준은 잠시 넋을 놓고 종이봉지에서 만두를 한 개 더 꺼내는 은실을 보고 있었고-그 모습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은실은 그 시선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얼른 만두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은실의 양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때 일준은 은실의 모습 뒤로 흐릿했던 어떠한 피사체를 순간 선명하게 잡아냈다. 일준의 눈이 커졌다. 분명 승재였다. 조금 먼 곳의 골목 뒤에 숨어 보고 있었지만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일준과 눈이 마주친 승재는 부를 새도 없이 금방 뒤돌아 도망치듯 달렸다. 그 순간 일준은 은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달려나갔다.
일준의 달리기가 승재보다 훨씬 빨라서, 제 아무리 열심히 도망간다고 해도 금방 따라 잡힐 수밖에 없었다. 일준이 승재의 옷을 꽉 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승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만…”
일준은 꽉 쥐었던 승재의 옷깃을 놓았다. 승재가 고개를 들어 겨우 일준을 보았다. 일준은 깜짝 놀랐다. 승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울어!”
일준은 어쩔 줄 몰라 물었다. 승재를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이제 나랑 안 놀 거야?”
일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나까지 울면 승재는 말도 안 해주고 또 도망갈 거야.’
일준은 승재의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승재는 겁쟁이였다. 또 겁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준은 승재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미안해.”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고, 승재가 겨우 한마디 했다.
“응? 괜찮아.”
일준이 조심조심 대답했다. 속으로는 내심 놀란 채로. 또한 무엇을 사과 받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그런데 뭐가 미안해?
승재가 물었다.
“그냥… 같이 안 놀아서 미안해.”
“그럼 같이 놀자.”
“그리고,”
일준은 뭐든 괜찮았지만, 승재는 또 미안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짓말해서 미안해.”
그 말을 내뱉고, 승재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언제 거짓말을 했더라?’
서럽게 우는 승재를 두고 일준은 잠시 고민했다.
“거짓말?”
“나 사실 여기 안 살아.”
승재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제야 기억할 수 있었다. 물을 맞은 채 자신을 바라보았던 승재의 표정을. 그건 물을 맞아 놀라서 지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별안간 두류공원 상가의 뒷골목에 등장한 일준을 보고 지은, 당혹스러운 표정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그… 나는 재개발하는 집에 사니까…”
“재개발하는 집?”
“으응? 그게…”
“재개발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나도 몰라, 근데… 나쁜 것 같아.”
승재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갔다. 쉴 틈 없는 일준의 질문에 당황한 것 같았다. 일준 또한 한 번도 본 적 없던 승재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일준은 일준막에 걸려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재개발이든 뭐든 별 상관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승재한테는 아닌 것 같았다.
“넌 안 나쁘니까 괜찮아!”
일준이 쪼그려 앉아 승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승재가 물었다.
“진짜! 그니까…
일준은 잠시 말을 골랐다.
“우리는 친구야.”
일준이 승재의 손을 잡았다. 꼭 잡은 손 위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일준의 볼에도, 승재의 신발에도, 이곳저곳에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눈이다…”
승재가 중얼거렸다. 그때 일준은 번쩍 정신이 들어, 무언가를 잊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은실이!”
일준은 승재의 손을 잡고 시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후라 사람이 더 많아진 상태였고 그 속에서 은실을 쉽게 찾기는 힘들었다. 일준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입구 근처 길목에 쪼그려 앉아있는 은실을 발견했다.
“은실아!”
일준이 외쳤다. 은실이 뒤돌아보더니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나만 두고 어디를 가니?”
“미안해…”
은실은 여전히 심통 난 표정이었고 그 앞에서 일준은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어디 멀리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은실이 사라지고 없었다면 그보다 아찔한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와, 잘 만들었다.”
승재가 말했다. 은실이 쪼그리고 앉아있던 자리를 힐끗 보고 한 말이었다. 은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와, 눈사람이네? 그것도 두 개나?”
“응. 아까 내가 만든 거야.”
사람의 발이 잘 닿지 않는 길목에 눈사람이 두 개가 서있었다. 구석에 가득 쌓여 있던 눈을 뭉쳐 만든 듯싶었다.
“이건 일준 눈사람이고, 이건 은실 눈사람이야. 나는 단추도 달았다? 왜냐면 나는 단추 달린 옷 입었는데, 일준 옷에는 단추가 없으니까.”
은실이 그새 신나서 조잘거렸다. 승재가 부러운 눈으로 일준을 쳐다보았다. 별안간 일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란히 서있는 은실 눈사람과 일준 눈사람이라니!
“우리 승재 눈사람도 만들어주자.”
일준이 말했다. 그리고 푹 주저앉아 눈을 마구 그러모았다. 차가운 바람에도 달아오른 얼굴은 식지 않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실과 승재도 일준 옆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눈을 모았다. 함박눈은 복작거리는 시장바닥을 비롯한 마을 곳곳에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한국소비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