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무라(MOORA) 작가님 첫번째 이야기 1-9

[RED 빨강이야기] 1-9. 은실

한국소비경제신문 승인 2021.01.24 14:12 | 최종 수정 2021.06.17 18:11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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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빨강 이야기]

무라(MOORA)

그 후, 일준은 밖에서 노는 시간의 대부분을 승재와 은실과 함께 했다. 그들은 동네 골목 이곳저곳을 탐방했고, 돌로 흙바닥에 땅따먹기 지도를 그려 뛰놀았으며 눈이 오면 눈송이를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애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두류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이었고 심판은 대부분 은실이 보았다. 진 사람은 만두나 붕어빵, 뻥튀기 같은 주전부리를 샀다. 신기하게도, 셋은 어떠한 약속 없이 점심시간이 적당히 지나고 나면 일준의 집 앞이나 시장 입구에서 잘만 모였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일준은 은실을 보기 힘들어졌다. 한파가 계속되면서 대부분의 것이 꽁꽁 얼어버렸고, 그 때문인지 은실이 두류공원 밑으로 잘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 빙판길에 밖에 돌아다니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할머니도 특히 일준한테 주의를 주었다. 두류산의 오르막은 더욱 오르기 위험하고 힘들어져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하늘이 맑고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날이 찾아왔을 때, 일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할머니가 밥만 차려 놓고 동네 경로당 모임에 나간 사이에 밖에 나오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한쪽 주머니에는 은실에게 건넬 귤도 두 개나 들어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상했다. 뒷골목이 더 썰렁한 느낌이었다. 단지 날이 추워져서 그런 것일까? 분명 처음 상가건물에 걸렸던 일준막은 두 개였는데, 언제 저렇게 많이 늘어났지 싶었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의 일준막이 반쯤 떨어져 나간 채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전에 승재가 말했던 ‘재개발’이라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일준은 멈춰 섰다.

재개발. 듣기에 기분 좋은 단어는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무겁고, 딱딱한 느낌이었고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두류 제1구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돌연 무서웠다. 주위는 조용했고 사람 하나 없었지만 일준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른들이 또 싸우고 있구나.’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과 경찰 군인들이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사람들이 폭도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연기가 마구 나서 거리가 뿌옇게 변하고, 그 사이에서 깃발과 일준막이 흔들리는 장면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일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서 은실을 찾아야 했다.

골목마다 서린 한기에 몸이 이따금 떨렸다. 은실의 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은실아!”

몇 번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일준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은실을 부르며 대문을 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일준은 대문 옆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나와 금방 흩어졌다. 일준은 몇 번 더 큰 숨을 내쉬며 하얀 입김이 모여 올라가다가 공중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대문 너머에서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일준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돌아보았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고, 까만 점퍼에 초록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나왔다. 은실의 오빠인 것 같았다. 은실과 눈이 유난히 닮아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은실이 지금 없는데.”

무미건조한 말투로 은실의 오빠가 말했다. 덜덜 떨고 있는 어린 소년한테 다정하게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은실을 왜 찾는지 그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일준이 누구인지는 관심 밖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다소 짜증이 섞여 있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유가 딱히 일준한테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준은 이유 모를 죄책감에 우물쭈물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아냐. 다음에 다시 와라.”

그가 금방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복잡한 심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르고, 은실의 오빠는 잘 가라는 말 한마디 던지고는 들어가버렸다. 대문이 닫히고 슬리퍼 끄는 소리도 멀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일준은 결국 은실이 왜 없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 언제 다시 오면 좋을지도. 다음에 다시 오라던 그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분명 다음을 기대하지도, 기약하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준은 은실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함께 모여 눈을 뭉쳤던 골목에 눈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쌓여 있던 눈도 까맣게 물들어 녹아 질척거렸다. 일준의 발걸음이 후회와 미련으로 점점 무거워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바로 집에 들어갈 수도 없어서, 일준은 문방구에 들렸다. 딱지라도 사서 집에서 갖고 놀면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문방구 가판대 앞에서 딱지를 구경하다가, 문득문득 은실이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곧 은실은 학교에 갈 것이고 그러면 자주 볼 수도 없을 텐데. 일준은 간절하게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런 일준의 눈길에 닿은 것은 벽에 걸려 있던 빨간 리본 묶음이었다. 일준은 이전에 은실과 학교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신나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학교에 가려면 빨간 리본과 명찰이 필요해.’

일준은 돈을 탈탈 털어 빨간 리본과 명찰을 샀다. 이름을 쓸 두꺼운 검정색 펜도 하나 샀다. 일준은 빨간 리본과 명찰을 주머니에 잘 넣었다. 이것 말고 필요한 게 더 있나 싶었지만 돈이 모자랐다. 당장은 이것만 있으면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일준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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